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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 독후감

K히메 2011. 1. 26. 22:59

Henri Pirenne/강일휴 역, 『중세 유럽의 도시』, 신서원, 1997

독후감을 쓰기 위해 도서관을 어슬렁 어슬렁 돌아다니다 결국 맘에 드는 책을 찾지 못하고 나오고 있었다. 그 순간 반환도서 사이에 끼어져 있는 중세유럽의 도시라는 이 책이 눈에 띄었다. 바로 집어 들고 도서관을 나와 읽기 시작했다. 아마도 예전에 쓴 독후감 중에서 제목은 생각이 나지 않지만 다섯 가지 키워드를 가지고 역사를 쓴 책이 있었다. 중세유럽의 도시라는 제목부터 왠지 도시를 중심으로 역사를 기록한 책이 아닐까 라는 생각에 이 책을 들게 된 것 같다.

이 책에서 다루는 중세도시에 대한 내용은 대부분 한 장에서 두 장으로 다루어진 세계사 책이나 한 단원 정도로 나와 있는 교과서에서 읽은 내용과는 다르게 아주 그 시대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는 책이다.

책에 나와있는 저자에 대한 설명을 간략히 요약하면 저자인 앙리 피렌느는 1차대전 중의 벨기에 학자로써 대전 중 저항운동가로서 역사서술에 있어서 그것을 경제적인 면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했다. 또한 세계대전의 주제인 게르만족의 유럽 내의 정치적 헤게모니행사를 막기 위한 학문적 장치로서, 이 같은 경제사적인 면을 강조했을 수 있다. 이 책에서 앙리 피렌느는 유럽의 전반에 걸친 역사를 기존의 정치중심의 서술에서 경제중심의 서술로 바꿔 새로운 역사서술을 전개하였다. 또한 중세유럽의 발전과 변동의 중심이 이슬람 세력과 같은 외부세력에 의한 것이었다는 것들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중세유럽에 형성된 도시를 살펴보기 위해 8세기, 9세기의 중세유럽사회 상업의 쇠퇴와 부활, 도시의 형성이라는 구조에서 설명하였으며, 도시 내의 제도와 도시민들의 기원과 설명, 중세 유럽의 도시가 유럽문명에 끼친 영향들을 설명하였다. 왠지 시작부터 책을 잘못 고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거의 전공서적에 가까운 느낌이랄까? 다시 책을 살펴본 결과, 1997년도 책이다. '아 잘못 골랐구나'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래도 현대사회의 급변하는 정보를 다룬 책이 아닌 역사서이기 때문에 괜찮다라는 생각으로 읽기 시작했다.

역사란 서서히 쌓여 움직이기도 하지만 갑자기 변화하기도 하듯이 앙리 피렌느는 중세유럽의 발전과 변동의 원인이 이슬람 세력의 침입이라고 강조하였다. 상업이 쇠퇴하면서 나타난 중세의 크나큰 변화와 그 시대 유럽도시의 변화를 알기 위해서는 그 원인인 이슬람의 침입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슬람 침공이전의 메로빙 왕조는 이민족이 세운 국가였음에도 지중해적 요소가 남아있었지만, 이슬람세력의 팽창과 동 시대에 형성된 카롤링 왕조는 더 이상 그러하지 못하였다. 경제사적인 모습에서 해양 국가였던 메로빙 시대는 지중해를 중심으로 상업과 교역이 중심인 사회였지만, 샤를마뉴의 카롤링 왕조시대는 외부와의 교역은 있을 수 없는 폐쇄적인 내륙 국가였다. 카롤링 왕조시대는 일부 파피루스, 향료의 수입 등이 있었지만 점차 중단되거나 미비한 것들이었다. 또한 이슬람 세력을 확장해 지중해의 완전장악에 들어갔으며 이와 함께 북해지역에서는 노르만인들의 침공과 약탈로 인해 유럽사회는 완전 고립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의 9세기의 모습에서 상업은 존재할 수가 없었으며, 화폐에 있어서도 금화가 점차 사라지고 은화가 유통되었다. 이시기에 상업의 흔적이라고는 포도주, 소금 등의 필수품의 운송, 불법적인 노예무역과 유태인의 중개를 통한 소규모의 거래는 있었다. 하지만 이 같은 것들은 정규적 정상적인 상업 활동, 항상적 조직적인 교류, 전문적인 상인계층이 수행하는 교역행위 등의 교환경제의 본질들이 사라졌다. 다시 말해 이슬람의 침입으로 상업이 사라졌다고 말할 수 있다.

농업중심인 중세사회에서 십자군전쟁을 통해 막혀있던 지중해가 다시 열리면서 해외상업이 다시 활기를 띠어 상업이 부활하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기존에 농업중심이었던 사회에서 어떻게 전문상인들이 생겼는지에 대해서 궁금하게 되었다. 이 책, 내 마음을 잘 아는 듯 저자 역시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상업이 유행했던 베니스는 지리적으로는 서유럽에 속했지만 생활양식이나 사고방식에서는 서유럽과는 이질적이었고 이슬람세력에 의해 동방과 교류가 단절되었던 시기에도 비잔틴령 이탈리아와 콘스탄티노플과 계속해서 교류를 하였기에 베니스에는 활발히 항해활동을 하였던 상인이 존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업이 미비하였던 유럽내륙에서는 도대체 어떻게 전문상인들이 출현할 수 있었을까? 라고 저자는 질문을 하고 있다. 그리고 성 고드릭의 전기를 통해 이를 설명하고 있었다.

성 고드릭은 11세기 말경에 링컨셔의 가난한 농민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 생계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모든 시대의 불행한 자들처럼 그도 해변에서 파도에 떠밀려 온 표류물을 줍는 자였다. 이루 그는 어떤 행운의 표류물로 인해서 행상인이 되어 등에 짐을 지고 도처를 편력하였다. 결국 그는 약간의 자본을 축적했고, 어느 날 편력도중에 만난 일단의 상인들과 합류하였다. 그들과 더불어 그는 이 시장에서 다른 시장으로, 한 정기시장에서 다른 정기시장으로,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편력하였다, 이처럼 직업상인이 된 그는 급속하게 축재하여, 동료들과 조합을 결성하고 그들과 공동으로 상품을 선적하고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덴마크, 플랑드르의 해안을 따라 해상교역에 참여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한 조합은 아주 번창하였고, 그 조합은 어떤 상품을 선적해서 그 상품이 귀한 지역으로 운송하고, 다시 이 지역에서 풍부하게 생산되는 상품을 선적하여 이런 상품의 수요가 많아서 큰 이익을 남길 수 있는 다른 지역으로 운송하였다. 몇 년이 지나자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이런 용의주도한 사업으로 고드릭은 큰 부자가 되었다.

이 이야기는 어떻게 한 평범한 사람이 부유한 전문상인으로 거듭났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당시 행운과 특히 상황이 그의 재산형성에 크게 작용하였다. , 어떤 행운의 표류물로 인해서 우연히 행상인의 길로 들어섰고, 상인들과의 조합을 통해 크게 성장한 것이다. 여기서 상인 조합을 형성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11세기 사회에는 여전히 폭력이 난무하였기 때문에 개인의 진취성으로는 성공하기엔 부족했고 상인들의 편력생활은 너무나 위험했다. 그래서 협동에 의존하고 집단을 형성해서 방어를 했어야 했다. 예를 들어 정기시장과 상설시장에서 분쟁이 발생할 경우에 상인은 법정에서 그의 집단동료들을 자신의 편을 들어줄 증인이나 보증인으로 세웠다. 그리고 자본이 부족해서 혼자서는 많은 상품을 도매로 살 수 없었기 때문에 상인들은 공동으로 다량의 상품을 구입하였다. 한 상인의 신용은 그가 속한 집단의 신용에 의해 높아졌고, 그럼으로써 그는 경쟁에서 쉽게 이겨 큰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나는 성 고드릭이 부유해진 것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상인이 될 수 있었는가에 초점을 맞추었다. 유럽내륙에 전문상인층이 등장한 시기는 10세기이며 11세기부터 가속되었다. 이 시기 인구증가는 토지의 부족으로 이어져, 토지로부터 유리되고 뿌리내리지 못한 사람들이 임시취업을 하거나 약탈과 강도짓을 하는 방랑생활을 하였다. 이들은 취직이 되거나 이익을 얻을 가능성이 있는 항구나 시장주변으로 가서 하역인부로 일하며 외국어나 여러 지역의 관습과 경제상황을 배우게 되었다. 방랑자들은 수완과 명석함으로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곳으로 물건을 팔면 쉽게 부를 축적하여 신흥부자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인구 증가로 인해서 토지를 얻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 돈을 벌기 위해서 상업에 뛰어든 것을 계기로 유럽내륙에도 전문상인들이 생길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보면 영주의 밑에서 힘들게 농노로 사는 것보다는 장원을 빠져 나와 상인으로 직업을 바꾸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상인들에게도 힘든 사정이 있었는데, 바로 이들의 애매한 신분이었다. 6장의 도시의 형성과 부르주아지를 읽으면서 개인의 신분문제에 대해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교구에 소재하고 있던 교회법정은 교회법뿐만 아니라 상속문제, 신분문제, 결혼문제에 관계없이 성직자들과 이해관계가 있는 모든 문제를 다뤘다. 특히 개인의 신분문제는 더욱 복잡했는데, 도시 형성기에 개개인의 신분은 아주 대조적이고 다양하였다. 상인은 사실상 자유민으로 다뤄졌으나 새로운 일자리를 얻으려고 도시로 몰려든 많은 이주민의 경우는 달랐다. 그들은 거의 인접한 농촌에서 태어난 사람이었고, 따라서 그들의 신분을 숨길 수 없었다. 그들이 도망쳐 나온 장원의 영주들은 쉽게 그들을 발견하고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이 태어난 촌락의 사람들이 도시로 왔을 때 우연히 그들을 만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부모가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농민들의 대부분이었던 농노신분으로 태어났다는 점이 명확해졌다. 상인들이 태어났을 때에 신분이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유를 향유하였던 것과는 달리, 그들은 상인들이 누린 이런 자유를 주장할 수 없었다.

따라서 대다수의 직인들은 도시에서도 그들이 탄생할 때의 신분인 농노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들의 새로운 사회적 신분과 전통적인 법적 신분 사이에는 분명히 모순이 있었다. 그들이 그런 신분을 감추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 영주가 그들이 원래 자기사람이었다고 주장하기만 하면 그들은 영주를 따라, 도망쳐 나왔던 장원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상인들은 농노제의 폐해를 간접적으로 증오하였다. 그들이 결혼 상대자로 선택한 여성은 거의 농노계층에 속했다. 아주 부유한 일부 상인들만이 빚에 쪼들리고 있던 기사들의 빚을 갚아주고 이들의 딸과 결혼하는 영광을 꿈꿀 수 있었다. 대다수의 다른 상인들은 농노 여성과 결혼하였고, 그 결과 그들 자식도 농노신분이 되었다. 관습법에 따르면, '출생은 어머니를 따른다' 라는 속담에도 나타나 있듯이, 자식의 신분은 어머니의 신분에 의해 결정되었다. 가족신분에 대한 이러한 원칙에서 야기된 불합리한 결과를 상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즉 상인은 자유를 누렸지만 그 자식은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처럼 성 고드릭의 전기를 읽고 누구나 자유롭고 부유한 상인이 될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지만 아직 상인들을 보장해줄 법이 없었기에 그들은 신분적으로 영주에 묶여 있는 신분이었다. 게다가 출생은 어머니를 따르게 되어있어서 진취적인 남성이 아무리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였다 하더라도 농노 여성과 결혼하면 자신의 부와 자유를 자식들과 나눌 수 없는 슬픈 상황이었다. 부를 축적한 상인들의 생활이면에는 이런 힘든 상황이 있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이러한 현실에 맞지 않는 기존의 법은 개혁이 필요했기에 상인들은 점점 자신들의 자유와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상인법을 만든 것이 단지 상업에 편리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신분에 대한 갈등도 한 몫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보면 이슬람세력 때문에 지중해의 길이 막히고 그로 인해 상업이 쇠퇴했으나, 십자군 전쟁을 통해 다시 열린 지중해를 통해 상업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길이 생기게 되었다. 인구 증가를 통해 자신의 지위가 불안했던 귀족의 차남들과 토지를 얻지 못한 방랑자들이 상업에 뛰어들었다. 상업이 미비했던 시기에 자급자족의 형태로 생산욕구는 낮았지만 상업의 길이 열리면서 잉여생산물을 만들기 시작했고 이를 시장을 통해 교류하기 시작하여 농민들도 부를 축적하였다. 부유해진 농민들은 영주에게서 벗어나게 되었고 장원은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상인들의 자본주의는 근대로 한걸음 다가가게 되었고 상인들의 세속정신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발생시키게 된 것이다.

처음 이 책을 집어 들면서 생각했던 것은 도시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어떤 도시는 이렇게 흥하고, 어떤 도시는 이렇게 망했다 이런 스토리를 원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던 스토리보다는 중세사회의 도시 전체에 대한 공통부분을 설명하고 있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은 이미 고등학교 때부터 배워왔던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담고 있는 상세한 중세유럽의 도시 상황은 기존에 내가 알고 있던 사실을 더욱 상세하고 자세하게 알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쉬운 책도 아니었고, 처음 생각과도 다른 책이었고, 그렇게 재미있게 책이 구성된 것도 아니었다. 용어를 찾느라 독후감을 쓰면서도 몇 번씩 책을 들여다 볼 정도로 생소한 용어들도 많았다. 정말 나의 역사에 대한 관심으로 읽은 책이었다. 이 책은 나에게 내가 알고 있는 중세라는 나무에 가지와 잎이 더해진 느낌이었다. 이런 것도 독서의 재미 중 하나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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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앙리 피렌느

저서 (총 3권)
앙리 피렌느 1862년 12월 22일 벨기에의 베르비에에서 직물업에 종사하는 집안의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그가 엔지니어가 되기를 바랐지만 역사가가 되겠다는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그는 리에주 대학교에 진학해 1883년에 중세 디낭을 주제로 하는 논문을 써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위를 취득한 다음 해인 1884년에 그는 장학금을 받아 독일로 건너가 라이프치히와 베를린에서 공부했다. 이어서 1885년 파리에서 국립 고문서 학교와 파리 고등 연구원에서 수학했다. 1886년 그는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겐트 대학의 교수로 임명되어 중세사와 벨기에 역사를 담당했으며, 1930년 정년퇴직을 할 때까지 이 대학에서 근무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개인적으로나 학문적으로 피렌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1914년 8월 3일 독일군이 벨기에를 침공했고 그의 아들 피에르 피렌이 전사했다. 한편, 피렌은 독일 역사가 카를 람프레히트와 학문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람프레히트가 벨기에인들을 독일과 협력하게 하는 사업의 책임자가 되자 그와 절교했다. 독일군은 저명한 역사가인 피렌이 대학에서 강의를 계속하도록 했다. 그러나 피렌은 저항운동에 참여했고, 체포되어 독일로 압송된 1916년부터 종전을 맞은 1918년까지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동부전선에서 포로로 잡힌 소련 병사들로부터 러시아어를 배우는 한편, 벨기에 포로들에게 벨기에의 역사를 가르쳤으며, 순전히 기억에 의존해 '유럽의 역사'를 집필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학문적으로도 피렌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피렌이 체포되어 심문받을 때 독일군 장교가 왜 독일어를 잘하면서 프랑스어로 답변할 것을 고집하느냐고 묻자, "나는 1914년 8월 3일 이후 독일어를 잊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1차 대전 이후 그는 '게르만주의'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리고 그는 독일에서 공부할 때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아 결정론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점차 우연한 사건이나 개인의 역할 등에 중요성을 부여한 것도 1차 대전에 대한 그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주요 저작은 크게 세 종류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중세의 개막에 관한 것으로, 대표적인 저작이 바로 '마호메트와 샤를마뉴'다. 피렌은 생전에 자신의 손으로 이 책을 탈고하지 못했다. 그가 죽은 후 제자 베르코트랑이 아직 미완성 상태에 있는 각주 등을 보충한 뒤 그의 아들 자크 피렌이 1937년에 이 책을 출판했다. 둘째, 중세도시에 관한 것으로, 이에 관한 대표적인 저서로 '중세도시'(1927)가 있다. 셋째,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자신의 모국 벨기에의 역사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관한 대표적인 저서로 '벨기에의 역사'(7권, 1899∼1932)가 있다. 이외에 포로수용소에서 집필하기 시작했으나 완성하지 못한 '유럽의 역사'(2권)가 손질을 거친 뒤 (기억에 의존해 썼기 때문에 연도 등은 대부분 괄호로 표시되어 있었다고 한다) 1956년에 뒤늦게 출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