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독후감
이번 달 독후감 숙제는 학교 레포트가 너무 많으니 학교에 제출할 레포트로 쓴 독후감을 받아 달라고 하여 그러라고 하였다.
책명: “미디어의 이해”
저자: Marshall McLuhan(1964),번역:박정규
먀샬 맥루한은 1911년 7월 캐나다 서부 앨버타주 애드먼턴에서 스코티쉬, 아이리쉬계 양친 사이에서 태어났다. 1928년 캐나다 마니토바대학에 입학, 기계공학을 전공했으나 영문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영국 엘리자베스1세 시대 시인 토마스 내시의 수사법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39년 미국 텍사스 출신 여배우 코린 루이스와 결혼한 그는 영화에도 애정이 깊어 나이 66세인 1977년 우디 앨런 감독의 '애니 홀'에 단역배우로 출연하기도 했다. 엔지니어를 한때 지망했던 맥루한은 71년 그의 조카와 함께 속옷에서 오줌냄새를 제거하는 물질을 개발하여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 발명가이기도 했다. 64년 '미디어의 이해' 출간이후 '텔레페서'(TV에 잘 출연하는 교수)가 됐고, 각종 강연, 인터뷰에 불려다닌 '스타 교수'였다.
☞ 미디어 이론가로서의 맥루한
마샬 맥루한만큼 평이 엇갈리는 사람도 흔치 않을 것이다. '금세기 최고의 미디어 이론가'라는 찬사에서부터 '바보상자(TV)의 도사'라는 평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비평가 톰 울프의 말처럼 "만약 에 그가 옳다면 어쩔 것인가?" 프로이드나 아인슈타인에 버금가는 우리 시대 최고의 사상가로 대접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텐베르크 은하'(1962년) '미디어의 이해'(1964년)로 '맥루한 시대'를 활짝 열었고, '맥루한적인' '맥루한주의'등의 단어가 국제 미디어학계에 전파돼 갔다. 그러나 폭넓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에 대한 비판은 끊이지 않았다. 논리적 설명이 부족하고 통찰력과 직관에 의존함으로써 비과학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맥루한 자신은 "나는 설명하지 않는다, 탐구할뿐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미디어에 대한 그의 진지한 탐구를 인쇄시대의 '선형적' 방식으로 이해하려 하지 말고 TV시대에 걸맞게 '온 몸으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그를 옹호하는 사람이건 반대하는 사람이건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은 미디어에 대한 그의 견해가 대단히 독창적이라는 것이다. 역사학자 코스텔라네츠에 의하면 맥루한의 탁월함은 다른 사람들이 데이터만 보거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곳에서 중요한 의미를 찾아내는 데 있다고 한다. 사이버 공간이 창출하는 가상현실의 세계가 급속히 확장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맥루한이 30년 전에 간파한 것을 이제야 깨닫는 기분이다. 전자 네트워크의 신기술로 페르소나(가상인격)의 신세계가 창조되면서 우리의 삶이 근본부터 변하고 있지 않은가.
(위의 자료는 블로그 주인이 [레포트 월드]에서 가져와 보충함.)
1. 미디어는 메시지다
2. 핫 미디어와 쿨 미디어
3. 과열된 미디어의 역전
4. 기계 애호자 - 마취된 나르시스
5. 혼성 에너지 - 위험한 관계
6. 번역자로서의 미디어
7. 도전과 붕괴 - 창조성의 응보
8. 구어(口語) - 악(惡)의 꽃
9. 문어(文語) - 귀 대신 눈
10. 도로와 종이의 루트
11. 숫자 - 군중의 프로필
12. 옷 - 우리들의 확장된 피부
13. 집 - 새로운 모습과 새로운 시야
14. 화폐 - 빈자의 신용카드
15. 시계 - 시간의 향기
16. 인쇄 - 어떻게 그것을 파낼까
17. 만화 - `매드` 텔레비전으로 들어가는 입구
18. 인쇄된 문자 - 내셔널리즘의 건축가
19. 바퀴, 자전거, 비행기
20. 사진 - 벽이 없는 창녀의 집
21. 신문 - 뉴스 누설에 의한 통치
22. 자동차 - 기계신부
23. 광고 - 이웃에게 안 지려는 허세
24. 게임- 인간의 확장
25. 전신 - 사회의 호르몬
26. 타자기 - 타자기 글쇠의 시대로(Into the Age of the Icon Whin)
27. 전화 - 울려퍼지는 금관악기인가, 따르릉 울리는 상징인가
28. 축음기 - 국민의 가슴을 축소시킨 장난감
29. 영화 - 감겨진 세계. 또는 릴의 세계
30. 라디오 - 부족의 북
31. 텔레비전- 작은 거인
32. 무기 - 아이콘들의 전쟁
33. 자동화 - 삶을 배우기
・・・・・・・・・독후감 시작・・・・・・・・・・・・
1.서론
맥루한은 미디어의 변화를 어느누구보다 정확하게 예측해낸 학자라고 할 수 있다. 텔레비젼으로 대표할 수 있는 전자시대를 넘어 오늘날의 멀티미디어의 등장으로 인하여 그의 미디어 이론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 지고 있다.
맥루한은 모든 미디어가 인간 능력의 확장이라고 보았다. 책은 눈의 확장이고, 바퀴는 다리의 확장이며, 옷은 피부의 확장이고, 전자회로는 중추신경계의 확장이라는 것이다. 감각 기관의 확장으로서 모든 미디어는 그 메시지와 상관없이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데에 영향을 미친다. 맥루한은 미디어는 곧 메시지라고 말하고 있다.
'미디어는 메시지다.' 이 명제는 모든 미디어 테크놀로지가 점차 전혀 새로운 인간 환경을 창조한다 뜻으로 말할 수 있다. 미디어가 전달하는 내용 자체보다는 미디어 자체가 인간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맥루한은 인간은 원시부족시대에 오감이 조화를 이룬 감각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이 감각이 확장되면서 그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그것이 다시 기술을 가진 사회를 재구성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인쇄문자의 발명으로 균형적이던 원시인들의 감각균형이 깨지고, 시각 중심적인 인간을 만들기 시작하고, 16세기 인쇄술이 발명됨으로서 이를 더욱 가속화시켰으나 19세기 중반 전신의 발명으로 전자미디어 시대가 시작되었고, 복수 감각을 요구하는 텔레비전의 발명과 보급이 인간의 감각 균형을 복구시켜줌으로 인류를 다시 재부족화할 것이라고 보았다. 맥루한이 말하는 지구촌은 바로 이러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맥루한이 언급했던 지구촌 개념의 가능성은 가상공간이라는 것을 통해서 오늘날 현실화되고 있다.
2. 미디어는 메시지이다
미디어 이론가로서 맥루한 사상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인간의 감각 시스템에 관한 것이다. 맥루한에 의하면 인간이 갖고 있는 오감의 감각 전체가 상호의존 관계를 가지므로 하나의 체계를 구성하고 있으며, 각 감각은 균형상태를 이룬다는 것이다. 이 균형상태에서 시각은 청각과 상대적인 밸런스를 이루고 있다. 맥루한이 말하는 이상적인 커뮤니케이션이란 인간의 모든 감각이 총동원 되어서 대상을 종합적으로 느끼는 가운데에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감각이 한쪽의 확대되거나 손상을 입으면 새로운 감각배분의 원칙이 발생하여 균형이 깨지는 것처럼 인간 감각의 외부확장으로서 미디어의 등장도 인간 감각비율의 균형을 깨뜨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맥루한은 미디어는 단순히 커뮤니케이션 도구가 아니라 우리 감각을 외부로 끌어낸 인간 능력의 확장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동차의 바퀴는 발의 확장이며, 또 서적은 눈의 확장이며, 의복은 피부의 확장이고, 전자회로는 중추신경 체계의 확장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지배적인 미디어가 무엇이든, 인간 감각의 확장인 미디어는 우리의 사고와 행동유형 다시 말해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을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 감각의 확장인 미디어는 우리의 사고와 행동유형, 즉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을 변환시킨다는 것이다.
맥루한은 미디어가 곧 메시지다 라는 유명한 말을 했는데 이것이 바로 미디어의 영향을 중요시하는 맥루한의 상징적인 표현이다. 예를 들어 알파벳과 같은 표음문자가 등장하기 이전의 시대에서는 귀가 지배적인 감각이었고, 사람들은 부족의 세계, 곧 열정과 신비와 공동참여의 청각적 공간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희랍시대에서 표음문자가 생겨나자 귀는 눈에 자리를 내주고 감각의 균형은 비교적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눈의 세계로 옮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구텐베르크가 활판 인쇄술을 발명하게 되자, 사람은 선적이며 연속적이며 연관적인 방식으로 사물을 지각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구텐베르크 은하계’라는 새로운 환경이 생겨났다. 사람이 들고 다니는 책의 사회적 영향은 부족적인 세계에 떨어진 수소폭탄이나 다름없는 큰 충격과 같았다. 책을 통해서 인간은 처음으로 혼자서 읽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결과 개인주의가 싹트게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각자의 ‘관점’이 생겨났고, 경제적으로는 조립라인과 산업사회가 생겨났다. 맥루한이 싫어하는 자본주의, 세속주의, 산업주의, 민족주의 전문화 및 사회주의는 모두 ‘구텐베르크 은하계’의 소산이다. 19세기에 들어와서 전신이 발명되자 새로운 감각의 균형이 생겨났다. 구텐베르크 시대는 모든 면에서 밖으로 폭발이 이루어진데 반해 전기․전자시대는 안으로 폭발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전기․전자회로는 세계를 순식간에 연결하고 단편적인 것을 한데 통합시킬수 있었다. 또 종전의 선적이고 시각적인 속결방식은 절단되고, 청각적이고 촉각적인 감각생활이 또다시 나타났다.
결국 통신위성을 비롯해서 고속도의 각종 통신매체는 시각과 공간을 말살하고, 모든 것이 한꺼번에 생겨나는 환경을 만들었기 때문에 세계는 지구적인 마을이 되어서 누구나가 서로 관련을 맺는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텔레비젼과 같은 전자미디어는 보다 편안한 삶을 살기 위해 인간들의 능력에 따라 이용되는 도구라는 생각은 맥루한에게는 통용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미디어, 특히 텔레비젼으로 대표되는 전자미디어는 인간 자신의 오감을 사용하는 방법과 사건에 반응하는 전체 방법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결과적으로 인간의 전체 삶 그리고 전체 사회를 변화시킨다. 그래서 맥루한에게 있어서 텔레비젼과 같은 미디어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텔레비젼과 같은 미디어에 있어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러한 미디어가 인간의 감각형태를 변화시키는 방식이 중요한 것이다. 예를 들면 신문은 그 지면이 모자이크적, 불연속적이므로 그것을 수용하는 독자도 기사의 내용에 관계없이 모자이크적, 불연속적 인지방식으로 흐른다. 따라서 사고 형식이나 태도도 독립적으로 변한다. 즉 미디어가 갖는 특성은 그 내용과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작용한다고 하는 미디어 특성 결정론이 등장한다. 이러한 맥루한의 미디어관에서 나온 유명한 명제는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것이다. 맥루한의 이와 같은 주장은 다음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어떤 미디어나 기술이라도 그 ‘메시지’가 인간과 관계하면 그것에 의하여 척도가 바뀌거나 진도가 달라지거나 또는 기준이 달라진다. 철도는 달리는 일, 수송하는 일, 또는 차륜 선도를 인간사회에 끌어들인 것이 아니고, 전혀 새로운 종류의 도시나 일이나 레저를 낳고, 종래 인간의 기능을 촉진하고 또 규모를 확대한다. 이것은 철도가 통과하는 것이 열대지역이든 한냉지역이든 같으며 또 철도라는 매체가 운반하는 것이라든가 내용이 무엇이든 전혀 관계가 없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미디의 내용이나 방법은 여러가지이지만 그것들은 인간관계에 틈을 만들어 낼 수 없으며, 오히려 미디어의 내용은 우리가 미디어 자체의 본성을 이해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
그래서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맥루한의 개념은 미디어 메세지의 내용이라는 측면에 관심을 두면서 어떻게 사람들이 매체를 통해서 방영된 내용에 어떤 반응을 행사하는 가를 연구한 일반적인 연구자의 경향과 대치되는 미디어 결정론적 입장을 취하게 된다.
3. 핫(Hot)과 쿨(Cool) 미디어
이러한 변화의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 맥루한은 미디어를 쿨 미디어와 핫 미디어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맥루한은 깊이 관여하고 참여하는 것을 요구하지만 표면에 나타난 모습은 대단한 것이 아닌, 정보량이 적은 미디어를 쿨 미디어라 하고, 표면이 후끈하고 보내주는 정보량이 많지만, 참여를 요구하지 않는 미디어를 핫 미디어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맥루한은 핫 미디어와 쿨 미디어라고 하는 기본원리에 입각해서 모든 미디어를 정의하려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간과해서 안될 것은 현대 사회에 지배적인 미디어로서의 쿨한 특성을 지닌 전자 미디어라고 모두 텔레비젼과 같이 쿨 미디어가 아니라는 점이다. 반대로 이미 지난 시대의 미디어로서의 핫한 특성을 지닌 문자라 하더라도 인쇄문자와 같이 모두 핫 미디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초상화와 캐리커쳐는 전체적으로 보면 핫 미디어이지만 이 둘의 관계를 비교하면 초상화는 핫 미디어인 반면 캐리커쳐는 쿨 미디어이다. 또 무성영화와 텔레비젼은 전체적으로는 쿨 미디어이지만 이 둘의 관계를 비교하면 무성영화는 핫 미디어인 반면 텔레비젼은 쿨 미디어이다. 따라서 핫 미디어와 쿨 미디어의 관계는 연속 선상에서 구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처럼 쿨과 핫을 구분하는 기준은 단일의 감각수준에서의 상대적인 위치에 따라 즉 단일의 미디어라도 높은 선명도와 데이터의 충실도의 정도가 높은 상태의 미디어가 핫 미디어, 낮은 상태의 미디어가 쿨 미디어라는 점이다. 따라서 손으로 쓴 문자는 쿨, 활자는 핫, 라디오는 핫, 텔레비젼은 쿨 미디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맥루한은 인간이 그 감각기관을 전면적으로 움직여서 능동적인 전체인식을 행하는 상황을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다시 말해 감각기관의 전면적 동원이 보다 가능하고 전체적 인식에 가까운 미디어를 쿨 미디어로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맥루한이 핫 미디어와 쿨 미디어를 절대적인 의미를 지니거나 단순히 흥미를 불러일으키게 하는 수사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낸다. 그는 어떤 미디어는 정보량이 많으나 특정 단일 감각기관을 고도로 확장시켜 커뮤니케이션을 왜곡시키는 반면 또 다른 미디어는 정보량은 적지만 모든 감각기관들이 동시에 작용하게 하기 때문에 이상적인 커뮤니케이션 상황을 형성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핫 미디어와 쿨 미디어란 수사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에게 원시부족시대의 공감각적 커뮤니케이션으로부터 이탈하여 지금까지 단일 감각의 확장을 연속시켜 왔던 뜨거워져 최대로 긴장된 인간 커뮤니케이션 역사에서 최초로 시각과 청각을 복수로 사용하면서 모든 감각이 총동원되어 대상을 종합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텔레비젼은 커다란 사건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맥루한은 텔레비젼을 시청한다는 것은 책을 읽는 행위보다 능동적인 것이라고 하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반대되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책이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읽기만 하여도 다 소화할 수 있지만 움직이고 명멸하는 텔레비젼은 가만히 있으면 이해할 수가 없으며 그 과정에 직접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텔레비젼은 시청자가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미디어로서, 피동적인 태도에 머무는 것을 허용치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맥루한의 핫 미디어와 쿨 미디어의 구분은 인간 커뮤니케이션의 인식과정에 대한 이해를 통해 가장 이상적인 구어적 커뮤니케이션이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미디어를 파악하기 위한 시도와 함께 텔레비젼으로 대표되는 쿨한 미디어가 지금까지 활자 문자로 대표되어 왔던 핫 미디어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가 줄 것인가에 대한 이해를 위한 시도로 볼 수 있다.
4. '쿨' 미디어로서 멀티미디어
맥루한은 텔레비젼의 등장을 인간 커뮤니케이션 역사에 있어 커다란 사건으로 인식하는데 그것은 텔레비젼이 단일 감각을 최대한도로 확장하여 공감각적이고 즉각적인 인간 본래의 커뮤니케이션을 왜곡시킨 핫 미디어가 아니라 참여적이고 시각과 청각을 모두 사용하는 복수감각적 커뮤니케이션을 가능케할 쿨 미디어이기 때문이다.
결국 맥루한의 핫과 쿨 미디어의 구분은 인간커뮤니케이션의 인식과정에 대한 이해를 통해 공감각적이고 즉각적인 인간 본래의 커뮤니케이션을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미디어를 파악하기 위한 시도로 볼 수 있다.
이를 미디어별로 구체적으로 적용하면 다음과 같다. 활자 문자이후 전파 매체중에서 제일 먼저 등장한 축음기는 시각 표현 매체인 문자로 이루어지던 인쇄문자 대신에 청각 매체인 음성 메시지를 사용하지만 복합적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물론 기억 및 사용자의 조작 능력과 쌍방향성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또 다른 전파 매체인 라디오는 최초의 대중 전자 매체로서 커다란 위력을 발휘하였으며 아직도 그 가능성이 큰 매체이나 축음기와 마찬가지로 청각 하나만을 이용하는 단수 감각 커뮤니케이션을 사용하면서 또한 기억 및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은 실현되지 않는다.
카세트는 축음기와 라디오와 마찬가지로 표현 미디어에서 청각만을 이용하는 단수 감각 미디어이지만 기억기능이 저장되어 있고, 시간과 표현 미디어를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을 사용자에게 줌으로서 이란과 같은 핫한 사회에서 호메이니옹의 회교도 혁명을 가능케 했다.
신문과 잡지는 시각 하나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복합적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또한 쌍방향 및 기억 축적 커뮤니케이션도 이루어지지 않지만 시각을 중심으로 하는 정보 전달능력은 띄어난 미디어이다.
텔레비젼은 지금까지 하나의 감각만을 이용하던 단일 감각 위주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최초로 시각과 청각을 동시에 이용하는 복합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므로 지금까지 핫한 미디어 중심의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만 쌍방향 및 기억 축적 커뮤니케이션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전화는 청각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복합적 커뮤니케이션은 불가능하지만 개별적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은 이루어진다.
새로운 미디어로서 컴퓨터는 기존의 미디어가 지니고 있지 못하는 기억 및 축적 능력이 매우 띄어나며 전화선에 연결되어 쌍방향성 커뮤니케이션도 어느 정도 가능해진다. 그러나 문자위주의 시각 단일의 커뮤니케이션을 행하고 있다는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쌍방향성을 지니고 있는 전화, 복합적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는 텔레비젼과 기억 및 축적 능력이 띄어난 컴퓨터가 서로간의 부족한 특성을 보충하는 멀티미디어 컴퓨터가 탄생한다.
결국 인간커뮤니케이션이 복합적 커뮤니케이션, 쌍방향 커뮤니케이션, 기억 및 축적 커뮤니케이션을 모두 한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멀티 미디어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은 바로 인간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굳이 인간 커뮤니케이션과 차이가 있다면 멀티미디어는 시간과 공간이 확대된 커뮤니케이션을 한다는 것이다.
맥루한에 의하면 텔레비젼은 인간의 오관 중에서 대표적인 감각기관인 시각과 청각을 모두 사용한다는 점에서 시각 또는 청각 하나에만 의존하는 다른 미디어에 비해 훨씬 쿨하다고 보았다. 또 영화는 극장에 들어서면 관객이 선택의 여지가 없지만 텔레비젼은 채널을 돌려서 프로그램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부분적이지만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영화에 비해 쿨하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텔레비젼은 맥루한에게 있어서 인간 본래의 커뮤니케이션에 가장 가까운 미디어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복합적 커뮤니케이션, 쌍방향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기억 및 축적 커뮤니케이션을 멀티 미디어가 가능케한다고 할 때 맥루한의 관점에 따른다면 멀티 미디어가 바로 쿨 미디어라고 할 수 있다.
5.결론
마샬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의 중심 명제인 "미디어는 메시지다"에 대하여 동의하는 부분과, 반대하는 부분을 나누어 설명하는 식으로 결론을 적어보고자 한다.
동의하는 부분은 '모든 테크놀로지가 점차로 전혀 새로운 인간 환경을 창조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환경의 틀 즉, 새로운 미디어나 매체, 테크놀로지의 변화로 새로운 환경을 인식하게 된다는 의미인 것 같다. 1차환경의 내용의 변함이 없이, 1차 내용이 고스란히 2차적의 새로운 미디어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도 우리는 그것 자체를 새로운 환경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1차 환경이 하나의 메시지가 되는 것이다. 그 변화로 인지된 2차 환경이 3차 환경의 틀 안으로 들어가면 2차 환경자체가 또 하나의 메시지 역할을 하게되고 다시 새로운 3차 환경이 탄생하는 것이다. 즉, 새로운 형태의 환경은 그 이전의 환경을 하위 개념화하게 된다는 것. 맥루한의 미디어 자체가 메시지라는 것의 의미는 이런 식으로 해석해 보면 충분히 수긍이 된다. 소리에서 영상으로의 엄청난 매체 도입이 인류에게 엄청난 환경의 변화로 인식된 것만 보더라도 미디어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더 구체적으로 우리가 동일한 광고를 텔레비젼에서 통해 영상과 소리로 접할 때와 라디오를 통해 소리로만 접할 때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미디어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로서 어떻게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충분한 역사적 체험에 의해 수긍이 되는 그의 이론도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테크놀로지와 직결되는 미디어 자체가 그 내용인 메시지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매체, 미디어 자체의 효과를 무시 할 수는 없지만 그의 이론과 같이 미디어 자체만의 절대적 영향력에는 동의할 수 없다.
텔레비전을 예로 들어보자. 그의 이론대로라면 텔레비전이 정해진 어떤 특정한영향력을 행사하도록 되어있고, 그 안의 메시지가 어떠하든지 정해진 방향대로 수용자에게 인지된다는 것이 된다. 즉, 어떤 프로그램이든지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에 담기면 시청자에게 그 매체 자체의 힘에 의해 매체적 특성을 띈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텔레비전을 볼 때 다른 프로그램들에게서 동일한 영향력을 받지 않는다. 텔레비전을 통해 메시지를 접한다고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에 의해 제공되는 된다고 해도 절대적인 영향력만이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용에 따라 그것이 주는 영향은 판이하게 달라진다. 비약인 것 같지만 우리가 sbs와 ebs를 동일한 환경으로만 인식하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다.
저자약력
마샬 맥루한
1911년 캐나다 에드먼턴에서 태어난 맥루한은 영문학자로 출발했다가 커뮤니케이션 이론가로 변신, 사후에도 전자시대의 문명비평가 및 현대사상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1955년 미국 교육방송협회의 미디어 프로젝트 주임이었으며, 63년 터론토대학에 신설된 문화 및 기술연구소의 소장으로 취임하여 1980년 죽기 전까지 재직했다. 그의 저서 가운데 1964년에 펴낸 [미디어의 이해]는 '멀티미디어시대의 성서'라고 일컬어질 만큼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60년대 크게 붐이 일었다가 사그라드는 듯했던 그의 이론은 디지털 문화와 인터넷의 보급으로 그 선견지명이 실증됨에 따라 최근 들어 다시 각광받게 됐다.
1951년 문명비평서 『기계신부(The Mechanical Bride)』
1953년 커뮤니케이션 전문 연구지 『탐구(Exploration)』발행
1959년 『커뮤니케이션 탐구(The Exploration in Communication)』 편저
1962년 『구텐베르크의 은하계(The Gutenberg Galaxy)』
1964년 『미디어의 이해-인간의 확장(Understanding Media: The Extension of Man)』
역자 : 박정규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신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청주대 신문방송학과
출판사 서평
커뮤니케이션북스는 [미디어의 이해]가 커뮤니케이션학의 바이블임에도 불구하고 국내 번역본이 없는 것을 알고, 지난 20년 전 삼성출판사에서 출간되었으나 절판된지 10여년이 넘어 구할 수 없었던 책을, 번역자와 협의하여 용어와 표기를 현재에 맞게 고쳐 다시 출간했다.
디지털 혁명이 진행되고 인터넷이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파고들면서 '맥루한 이해(Understanding McLuhan)'의 붐이 일고 있다. 특히 마샬 맥루한의 주저 [미디어의 이해(Understanding Media)]는 이 책이 처음 발간된 1964년보다 1997년 오늘의 현실에 훨씬 큰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네트의 시대, 디지털 시대를 해명하기 위한 실마리를 [미디어의 이해]가 던져주기 때문이다.
"책이 활판 인쇄술 이전으로 돌아가 제작자가 소비자를 겸한 시대로 복귀할 것이며 일정한 주제로 순서를 찾아 구성되는 선형적인 책은 차츰 사라질 것"이라는 맥루한의 예언이 네트의 하이퍼텍스트(hypertext)를 통해 현실로 나타나고, '공간의 소멸'과 '지구촌(Global Village)'에 대한 그의 유토피아적 신비주의가 인터넷을 통해 구현되며, '우리는 도구를 만들었지만 앞으로는 도구가 우리를 만들 것이다'라는 경구가 사실로 드러나는 오늘의 현실 자체가 맥루한 르네상스를 가져온 직접적 원인일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듯 맥루한의 부활이 도처에서 이뤄지고 있다. 맥루한은 1980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맥루한의 중추신경은 전자적으로 확장되어 네티즌 잡지 '와이어드(Wired)'의 후원자로 되살아났으며, 곳곳에서 그의 사상을 네트의 시대에 되살리려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94년에는 네트 시대에 그의 저작이 지닌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려는 의도로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 출판부에서 [미디어의 이해]를 재발간한 바 있다. 그리고 커뮤니케이션북스에서는 미디어의 이해를 비롯해, 구텐베르크의 은하계, 미디어는 맛사지다 등 맥루한의 책을 계속 출간하고 있다.
그러나 죽은 맥루한을 온전하게 되살리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맥루한의 경구들을 인용하는 학자들은 더러 있지만 맥루한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미디어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만큼이나 드문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