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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큰별이 지다.

K히메 2010. 11. 1. 08:29

나의 외숙

의지와 체력과 머리

삼위일체로 조선내화(주) 그룹을 일구고

94세의 나이로 가셨다.

많은이 에게 넓고 큰 그늘이 되었던 분었다.

 

제주항공이 생겨서 좋다.

이전 같았으면 비행기 값이 너무 비싸 외숙의

장래식에 참석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갑자기 비행기표를 구했더니

거의  8만엔,,,,,이 거금을 주고 한국에 갔었다.

 

이번에도 그 정도였으면 많이 망설였을 것이다.

아니 학기 중인것을 핑계로 포기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저가 항공인 제주항공 덕분에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

(왕복 약35,000엔)

 

현대 아산병원에 도착하자 마자 염한다고 하였다.

염하는 마지막 모습을 지켜볼 수 있어서 더욱 감사했다.

마지막 가시는 길의 모습은 생전의 모습과 전혀 다름이 없었다.

여전히 강건함과 부드러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버지 염할 때도 느꼈지만 사람이 죽어도 그 모습 그대로 유지하는 것 같다.

 

20대를 조선내화에서 보낸  나에게 있어서

외숙은 거대한 바위셨다.

 

기업을 함에 있어서 닥쳐오는 외부의 변화에 대처하는 외숙의 모습은

조선내화를 떠나서

그리고 먼 타국에서 살아가는 나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이럴때 외숙은 어떻게 처리했을 까를 생각하며 어려움을 넘길 때도 많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했을 때였다.

박정희대통령이 외숙집을 방문했을 때 가족들과 같이 찍었던 사진을 응접실에 걸어두었는데

그 사진들을 치우라고 했다.

그리고 이틀을 응접실에 꼼짝 않고 앉아서 끊었던 담배를 연달아 피우며

초조해 하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그때는 그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내가 한국경제를 공부했을 때 그 때의 외숙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개발도상국에서 기업을 하는 분에게 있어서 누가 나라의 지도자가 되는가?

특히 쿠테타에 의해 나라가 좌우되는 시기에 있어서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틀뒤 상황이 안정되었는지 치웠던 사진들을 다시 응접실에 걸게 했다.

그리고 얼마뒤 전두환 전 대통령이 권력의 좌에 앉았다.

 

어렸을 때는 몰랐던 상황들이 한국경제를 앎으로써 외숙을 이해할 수 있는

사건은 그 후에도 얼마든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