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가 블러그에 외할머니를 그리는 글을 올렸다.
그 글을 읽으면서 생전의 외할머니 모습이 떠올랐다.
우리집은 걸어서 외가집 뒷담까지 3분거리에 있다.
(울 엄마는 친정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평생을 사시다 가셨네요^^).
그렇지만 외가집이 워낙 커서 대문으로 들어가려문 거의 10분 이상을 걸어가야 한다.
운 좋은 날 뒷문으로 들어가면 3분이면 집에 도착할 수 있다.
아주 많이 소개되어 있었다.
에피소드!) 아래 보시면 알겠지만 그 좋은 정원 한 기퉁이에 외할머니가 콩, 상추,파등을 심으셨습니다.
자식들이 아무리 성공해도 그 옛날 시골에서 농사 짓던 습성을 버리지 못하신것 같습니다.
인간은 나이를 먹으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다고 하니까 본래의 모습을 지키신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의 외가집인 이훈동 정원은 목포 유달산 자락에 있다.

여기는 성옥기념관인데 외숙 미수때(88세) 아들 딸들이 지어드렸다.
이곳에는 평생 외숙이 모은 그림, 도자기등 골동품과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유품들이 전시되어있다.
외할머니가 쓰시던 골무 비녀등,,,
외숙은 무지 무지 효자였다.
어려서 외할머니가 고생하는 것을 보고 외할머니 호강시키려고 돈을 벌고 싶었다고 한다.
해방직후부터 광산업,내화벽돌공장을 시작하였는데 사업이 성공하였다.
사업이 어느정도 기도에 오르자 젊은 잎새, 매취순, 복분자주로 유명한 보해가 위기에 빠졌을 때
목포기업을 살리기 위해 인수했다고 한다.
그런데 술 회사라서 영업을 하면서 술을 많이 마시고 늦게 들어오시는 것을 보고
할머니가 걱정을 많이 하셨다고 한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외숙은 보해가 기도에 오르자마자 다른 사람에게 넘겨버렸다.
외숙이 돈을 번 것은 어머니에게 효도하기 위해서 였는데 꺼꾸로 어머니를 걱정시키고 있다며,,,
외숙은 서예, 그림에도 능해서 한국화의 대가 허백련과 같이 그린 그림도 많은데
성옥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외숙은 어려서 집이 가난하지 않았더라면 화가나 서예가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외할머니가 고생하는 것을 보고 외할머니 호강시키려고 돈을 벌고 싶었다고 한다.
외숙은 판소리도 잘한다.
그래서인지 예술가들에게 많은 지원을 했다고 한다.
우리 언니도 판소리를 잘 하는데 집안의 내력인가 보다.
<<<아래는 다른 블로그에서 가져온 글이다>>>
이훈동씨는 1917년 10월 17일 해남에서 태어난 기업인으로 조선내화(주) 창업자이며 전남일보 발행인이다. 이훈동정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성옥기념관은 선생의 88세 미수(米壽)를 기리기 위하여 2004년 자녀들이 건립한 문화공간으로 대지 524평, 건물 224평, 높이 9m의 석조건물이다. 성옥기념관에 도착해 오전 9시가 안된 이른 시간이었지만 기념관으로 들어가 돌아보고 그곳에 있는 직원에게 정원은 어떻게 볼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이른시간이긴 한데 이야기 해 둘 터이니 집 앞으로 가서 초인종을 누르라고 했다. 그렇게 들어간 정원은 무척 넓었으며 관리를 하는데도 보통 정성이 들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전라남도 목포시 유달동 4-1번지에 있는 이훈동정원은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65호이다. 유달산(228m)의 남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1930년대에 일본인 우찌다니 만빼이(內谷萬平)가 만든 일본식 정원이다. 해방 후 해남 출신의 국회의원 박기배씨가 소유하던 것을 1950년대에 이훈동씨가 사서 소유하고 있다.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
현관
현관 입구에 삼성 고 이병철회장이 갖고 싶어했다는 향나무가 일품인데 사진이 없다.
50여 년이 지나는 동안 원형이 바뀌기는 했으나 일본식 정원의 특징을 전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개인정원으로는 호남지방에서 가장 큰 규모로 입구정원, 안뜰정원, 임천정원, 후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무의 종류도 113종에 이른다. 한국야생종 37종, 일본원산종 39종, 중국원산종 25종, 기타 12종이 있으며, 이 중에서 상록수는 69종으로 전체의 61%를 차지하고 있다. 정원수 중에서 현관 앞에 있는 암수 한 쌍의 일본원산 향나무는 사람이 심은 것이 아니라 자생목인데 일본의 화산 폭발 때 그 씨가 목포까지 날아와서 싹이 텄을 것이라 전해지고 있다.
유달산 유선각이 보입니다.
많이 올라 간 산입니다.
유달산은 228m인데 [두고 두고 팔아먹자]라는 뜻^^^
외숙 동상입니다.
동산 위에 잔디밭이 있는데
서울에 사신 외숙이 오시면 그 곳에서 파티를 자주했습니다.
그 큰집에 외할머니와 관리인 부부만 살고 있었는데 자주 놀러 다녔습니다.
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아~~글쎄 그 큰집에 저외에는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외할머니와 관리인 부부가 어디가고 없는 것입니다.
그 때의 공포란~~~~~무서워!!!!!
큰집은 큰 만큼 사람이 가득차야 좋은 것 같습디다.
우리 집은 유달산 중턱에 있었기 때문에 뒤에는 유달산 앞에는 막힐게 없는 목포 앞바다,,,,
전망하나는 기가 막혔습니다.
우리 식구들은 좁고 답답한 것이 싫다며 모두 큰집을 좋아하는데
넓은 뒤산(유달산)과 넓은 앞바다(목포앞바다)를 마음껏 즐겼기 때문일 겁니다.
정원을 만들었다는 우찌다니 만빼이를 예전 자료에서 찾아보았다.
전남의 쌀과 면화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내곡만평(內谷萬平)이 전남 산업계에 쏟아붓는 공로는 막대한 것이었다. 그는 병고현(兵庫縣) 출신으로 1909년(명치 42) 부산으로 건너왔으며 일찍 전남의 쌀에 관심을 두어 1911년(명치 44)에 목포로 옮겨가서 미곡무역상을 개업했다. 1933년 10월 당국의 면화증산계획에 순응하여 면화공장의 통제를 기도하여 자본금 150만원의 전남면화주식회사를 창립하여 목포지역에 이미 세워진 24개 조면공장을 합병하여 조면기 734대를 총괄하게 되었으며 영역을 확장하여 면화까지 취급했다. 조선취급소법이 공포되어 목포에 미곡거래소를 신설했다.
그는 당대에 백만장자가 된 사람으로 그간의 분투노력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떤 사업에도 손 대지 않은 것이 없는 그는 활동가였고 인내력이 강했다. 계획한 사업은 철저하게 진행했다. 이런 정열과 노력이 있었기에 그런 정도의 재력을 비축하여 남선(南鮮) 재계의 제일인자로 번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또 의리가 많았으며 의협심이 풍부해 공공을 위해 힘쓴 적도 매우 많았다. 세계적 시설로 일컬어지는 조선나예방협회(朝鮮癩豫防協會)가 설립되는 데에 기금 5만원을 기부하였다.
목포미곡취인소 이사장(木浦米穀取引所 理事長) , 목포제빙주식회사장(木浦製氷株式會社長), 목포미곡금융회사장(木浦米穀金融會社長), 전남면화회사장(全南棉花會社長) 등으로 광범위하게 활동.
가족으로 부인 내곡이자(內谷里子,1883년 8월생), 내곡현일(內谷賢一, 장남, 1910년 2월생), 내곡혜미자(內谷惠美子, 장녀, 1912년 10월생), 내곡천대자(內谷千代子, 차녀, 1914년 8월생)이 있었다.
현주소는 全羅南道 木浦 幸町 1丁目 13 이다.
이 주소와 현재 이훈동정원이 있는 곳의 위치가 1926년 지도로 살펴보니 서로 다른 곳이었으며 그로 미루어 보면 그는 그곳으로 나중에 이사를 한 것 같다.
참조: 조선공로자명감, 아부훈(阿部薰), 1935
사업과 향인 제1집, 고교삼칠(高橋三七), 1939
(재조선내지인) 신사명감, 조선공론사, 1917